2024 규문/이역만리 세미나/8주차 후기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상』 E.P.톰슨 (11~12장)
어떻게 순응하는 임노동자로 개조할 것인가?
상권을 마무리하는 두 장에서 톰슨은 노동하는 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산업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려웠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여러 가지가 있었을테지만, 여전히 매일 반복되는 산업 노동에 익숙하지도, 순응하지도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노동자의 몸과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공장에 매일 출근하고 정해진 노동을 기계처럼 해내고 임금을 받는 생활을 하기에 적합하도록 몸과 정신을 바꾸는 문제가 자본가들에겐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톰슨은 이 과제를 해결하는데 감리교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여러 자료들을 펼쳐 보여줍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여 순응하는 노동자가 됨과 동시에 일탈이나 혁명을 꿈꾸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들. 산업 부르주아지들뿐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들의 종교가 되는 이중의 직분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까? 감리교는 이를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찾아냈습니다.
공장제는 인간성의 개조를 요구한다. 장인이나 선대제 노동자의 ‘발작적 노동행태’는 인간이 기계의 규율에 적응할 때까지 규격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규율을 지키는 미덕이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감독관이 되지 않는 한) 전혀 세속적 이득을 가져다 줄 것 같지 않을 때, 어떻게 그 미덕을 그들에게 주입시킬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인간은 마땅히 그의 으뜸가는 행복을 현재의 상태가 아니라 미래의 상태에 기약해야 한다는 … 무엇보다도 중요한 교훈”이 주입됨으로써만 가능하다. 노동은 반드시 “초월적 존재의 사랑에 의해 … 우리의 의지와 애정 위에 고취된 … 하나의 순수한 덕행”으로서 수행되어야만 한다. (499쪽)
해 뜨기 전에 공장에 나가서 깜깜한 밤중이 될 때까지 쉼 없이 돌아가는 기계에 맞춰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는 일을 하는 몸, 주일에 교회에 나가 여러 활동과 더불어 찬송가를 통해 끊임없이 두려움과 환상을 가지고 자기를 감독하는 정신. “노동은 ‘개조된’ 공업노동자가 못박히는 십자가”였습니다. (508쪽)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여 –설령 그것이 고난일지라도 이 세계에서 받는 고난이 클수록 천국에서 받는 보상은 크리라는 기대감을 더 크게 가지도록- 규율에 순응하며 권위에 굴복해야만 공평한 은총을 받아 천년왕국을 약속받을 수 있다는 감리교 교리가 그 시대 비참한 노동자들에게 아편과 같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톰슨은 노동자들이 개인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에너지를 쓰지 않고 공장에서만 쓰도록 난폭하게 재주조되는 상황에 대해, 억압이라기보다는 징발이라 표현합니다. 혁명과 같은 특정한 상황에 에너지를 쓰지 못하도록 금지한 게 아니라 노동자들이 오직 교회를 위해서만 자신들 에너지를 쓰도록 교회가 징발했다는 견해입니다. 그러기 위해 오락을 통한 즐거움, 성적 쾌락 등은 모두 죄와 연결되었고 영국인들은 아주 뿌리 깊은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나폴레옹과 전쟁을 하는 기간 동안 아주 강력한 영향을 발휘한 조우애너 싸우스컷파, 천년왕국파, 루터파와 미묘한 차이와 긴장 관계를 유지했던 감리교는 그럼에도 언제나 교회 문을 열어 놓음으로써 이전 공동체로부터 뿌리 뽑힌 사람들에게 예전 방식과는 다를지라도 옛 방식을 대신할 만한 공동체의 맛을 다시 느끼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공동체로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일요 학교일지라도 노동자들은 교회 공동체로부터 양분을 얻어 노동자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직업적인 목사와 긴장 관계에 있었던 평신도 설교사들 역할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자에 의해서’ (546쪽) 이루어진 설교들, 농촌 지역 시골 목사들이 했던 설교들, 이 설교들은 계급의식적 형태를 띠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이들로부터 독립성과 자존심을 얻게 되었으며, 1810년에서 1830년에 이르는 20년 동안 차티스트 지도자들이 만들어지는 기간이 되었습니다.
어느 지역에서 공동체로 살면서 그에 맞춤한 자발적인 도덕을 만들었던 시대인들 (이인샘이 말한 간디의 ‘마을’ 민주주의)의 정신이 사라지지 않고 다시 노동자 공동체로 재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톰슨은 이 문제를, 내내 그러한 태도를 가졌듯이, 단순하게 어느 한 면으로만 보려 하지 않습니다. 변화는 노동자들이 점점 더 시간과 규율에 익숙한 모습으로 바뀌고 덜 난폭해지고 놀이나 스포츠도 예전에 비해 점잖게 앉아서 하는 것들로 바뀌었던 점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노동자들이 개혁 성향을 가지게 되었던 원인도 기독교 지도자들로 인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면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경제적 지위 변화를 통해 정치적·사회적 항의 운동을 강력하게 표명했던 것도 복합적인 지점이 있다고 봅니다. 북부 여성노동자들이 보여주었던 급진주의에 ‘잃어버린 지위에 대한 향수와 새로 발견한 권리에 대한 주장’ (569쪽)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산업이 분화되고 전문화되어가는 각 단계는 또한 가족경제를 강타하여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간의 관례적 관계에 혼란을 일으키고 ‘노동’과 ‘삶’사이를 한층 날카롭게 분리시켰다. 이러한 분리는 꼬박 100년이 지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노동하는 여성들의 가정에 어떤 이득을 가져다 주었으며, 그러한 이득은 노동절약장치의 형태로 주어졌다. 그동안에는 가족들은 아침마다 공장 종소리에 의해 사납게 찢겼으며 또한 한 사람의 임금노동자였던 어머니는 흔히 자신이 가정과 산업의 두 세계 모두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다고 느꼈다. (569쪽)
부르주아들이 관리 대상으로 여겼고, 감리교회는 두려움과 환상을 이용하여 산업 노동에 순응하는 인간으로 개조하기를 시도했으며, 예전 공동체가 가졌던 자기 규범을 만들 수 없도록 뿌리 뽑힌 도시 빈민들이 그 모든 관계들 안에서 자기들이 함께 나누어야 하는 연대와 도움을 다시 자각하고 공동체를 만들고 운영하고 지키고 키워온 모든 과정. 톰슨이 자신들의 선조인 노동자들에게 보이는 존경은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던, 혹은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영국 노동계급 역사를 읽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덧없게 느껴졌던 시간들을 다시 흥미롭게 만드는 힘도 톰슨이 보여주는 이런 마음과 자세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뒤로 올수록 재미있었던 영국 노동계급 형성 이야기는 이제 하권으로 이어집니다. 아마 더 재미있지 싶습니다.
전통적 생활방식에서 뿌리 뽑힌 노동자들이 휘몰아치는 변화에 순응하고만 사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서도 함께 살아갈 공동체는 생성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감(?)같은 게 느껴지더라구요. 톰슨은 사건을 바라볼 때 사건과 관계하는 하나하나를 깊게 살피며 가지를 펼쳐나갑니다. 이런 방식이 읽는 내내 단촐한 제 사고방식에도 경고를 주네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